-금명(錦溟)보정(寶鼎)의 종통(宗統)과 다풍(茶風)
현봉 (玄鋒: 송광사)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선사는 조선말기 송광사에 출가하여 주석(駐錫)했던 대종사(大宗師)이다.
선사의 속성(俗姓)은 김(金)씨, 이름은 첨화(添華), 법휘(法諱)는 보정(寶鼎)이요, 호(號)는 금명(錦溟)이며, 스스로 호(號)를 다송자(茶松子)라고 하였다.
이 근세의 송광사 역사에서 다송자 금명스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분이었다. 그래서 송광사에서는 2001년 10월 14일에 사계의 대덕(大德) 석학(碩學)들을 모시고 《다송자<금명보정선사>학술회의》를 개최하여 그 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조명하였으며, 이는 각계에서 다송자스님에 대해 현창(顯彰)하는 효시(嚆矢)가 되었다.
오늘의 송광사가 승보종찰로 조계산문으로 조계종의 근본도량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분의 업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 아직도 본사 대중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어서 이번 기회에 그 분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소개 하면서 그 분의 정체성을 밝히는 종통과 함께 자호(自號)를 다송자(茶松子)라 할 정도로 차를 즐기던 그 다풍(茶風)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행장
다송자 금명 보정선사에 대한 행장에 대해서는 그 분이 자신의 행적을 손수 기록하여 남긴 행록초(行錄草)와 송광사지(松廣寺誌: 2001, 도서출판 송광사)등을 참조하여 연대 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스님의 선대(先代)는 전남의 영암(靈巖)에 살다가 현(現) 순천시 주암면 비룡리로 이주하여 왔으며, 선사는 가락국왕(駕洛國王)의 후예인 학성군(鶴城君) 완(完)의 11세 적손(嫡孫)으로 1861년 <辛酉: 철종(哲宗) 12년> 1월 19일에 비룡리에서 아버지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상종(金相宗)과 어머니 완산(完山) 이(李)씨의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비단<錦> 같은 오색구름이 피어나는 가운데 시냇물이 넘쳐흘러 큰 바다<溟>를 이루는 상서로운 꿈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고 한다.
<그래서 이 태몽으로 인하여 뒷날 호(號)를 금명(錦溟)이라 하게 된다.>
선사(禪師)는 정수리가 우뚝 솟아 숙세(宿世)에 수행이 깊은 상호(相好)였으며 코가 높고 곧아서 골상(骨相)이 풍부한데다 총기가 뛰어나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나이 다섯 살에 이름을 영준(英俊)이라고 불렀다.
11살에 취학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가운데 병환이 든 어머니를 위해 4년 가까이 간병(看病)을 하면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눈 속을 헤쳐 지초(芝草)를 찾고 진흙을 뒤져 조개를 캐는 그런 효성을 다하였다.
15살이 되던 을해(乙亥: 1875)년에 집안이 어려워져 4형제가 제각기 흩어지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명(命)으로 순천 송광사로 출가하여 12월 20일 금련당(金蓮堂) 경원(敬圓)화상(和尙)을 의지하여 득도(得度)하였는데, 스승들에게 배우면서 한번 읽으면 그 때 그때 곧바로 외웠다.
16세이던 병자(丙子: 1876)년 어느 날 마음이 슬퍼지며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어 은사스님의 허락을 얻어 곧바로 집으로 가니 모친의 병이 재발(再發)하여 목숨이 호흡 간에 있었다. 시탕(侍湯)하기를 3일 만에 모친이 돌아가시니, 그 때가 5월 21일 이었다.
17세인 정축(丁丑: 1877)년 7월 15일에 경파화상(景坡和尙)에게서 대승계(大乘戒)를 받았다.
18세인 무인(戊寅: 1878)년 6월에 계사(戒師)인 경파스님을 모시며 천은사 수도암에 유학(遊學)하였다. 그리고 가을과 겨울에는 본사의 광원암(廣遠庵)에서 경붕(景鵬) 강백에게 나아가 기신론(起信論)을 배웠다.
19세인 기묘(己卯: 1879)년에는 본사의 서기(書記) 소임을 맡았다.
20세인 경진(庚辰: 1880)년 봄에는 지리산 법화암(法華庵)에서 혼해(混海)스님에게서 기신론을 다시 배웠으며, 가을에는 화엄사 구층암에서 원화(圓華)스님에게서 원각경(圓覺經)을 배웠다.
21세인 신사(辛巳: 1881)년에는 구련(九蓮)스님에게서 현담(懸談)을 배우고, 이듬해 임오(壬午: 1882)년 봄에 삼현(三賢)을 배우고, 가을에는 반야(般若)를 배웠다.
23세인 계미(癸未: 1883)년 봄에 광원암에서 원해(圓海)스님에게서 십지(十地)를 배웠다
24세인 갑신(甲申: 1884)년에도 계속 광원암에서 원해강백에게서 법화경(法華經)을 배웠다.
25세인 을유(乙酉: 1885)년 정월부터 선암사 대승암에서 함명(涵溟)종장(宗匠)에게서 염송을 배웠으며, 가을에는 본사 보조암에서 통사(通史)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을 읽었다.
26세인 병술(丙戌: 1886)년 1월 10일 해남 대흥사로 가서 범해(梵海)스님에게서 고문박의와 사산비명 등을 배웠으며, 구족계를 받고 범망경과 사분율 등을 배웠다. 8월에는 본사로 돌아왔다가 9월에 화엄사의 원화(圓華)스님의 강헌(講軒)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웠다.
27세인 정해(丁亥: 1887)년에는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과 사략(史略) 등의 제서(諸書)를 배웠다. 이처럼 제방(諸方)의 종장(宗匠)들을 찾아다니면서 내외(內外)의 전적(典籍)을 두루 섭렵(涉獵)하였다.
28세인 무자(戊子: 1888)년 1월 18일 속가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2월에 은사(恩師)의 부촉을 받들어 여산(礪山)의 심곡사(深谷寺)에 주석하던 신승(神僧)으로 알려진 허주(虛舟: 1815~1888)선사를 찾아뵙고는 허주선사로부터 금련당(金蓮堂)이라는 은사스님의 선호(禪號)를 받아오니, 은사스님이 말하기를 “내 평생의 원(願)을 네가 지금 이루어 주었구나. 그러나 지금 나는 병상에 있은 지 오래 되어 전해 줄 물건이 없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법을 구해 건당(建幢) 하도록 하라!” 하니, 답하기를 “십년 동안 가르치고 길러주신 본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마음을 전하는 법이 오직 우리의 가풍입니다. 물건의 있고 없음이 어찌 도를 만족시키겠습니까?”하였다. 은사스님이 “말이 그렇기는 하나, 내 입장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구나!”하였다. 은사의 병이 더욱 깊어지니 직접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씻어내면서 시탕(侍湯)의 정성을 다 하였다.
29세이던 기축(己丑: 1889)년 7월 26일 은사가 입적하니, 슬픔이 망극하여 한탄하며 심경을 읊었다.
雙親恩傅俱看病 양친부모 은사스님 모두를 간병하며
大小糞穢手自摩 더러운 똥오줌을 손에 직접 주물렀고
雪芝泥蛤皆常事 눈 속 지초 진흙 조개 예사로이 구했지만
最恨無能斫指蘇 손가락 자른 피로 살려내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30세 되던 경인(庚寅: 1890)년 2월 23일에 송광사의 보조암(普照庵)에서 전등식(傳燈式)을 행하고 은사인 금련당(金蓮堂) 아래로 건당(建幢)하니 부휴(浮休)선사의 14세(世)이다. 이어 강석(講席)을 열어 학인들을 제접(提接)하였다.
31세 신묘(辛卯: 1891) 봄에 보조암을 새로 수선(修繕)하고 서각(西閣: 변소)에 제사(祭祀)하던 폐단을 없애버렸다.
32세인 임진(壬辰: 1892) 2월에 고흥 능가산의 서불암(西佛庵)에 들어가 관음상(觀音像) 앞에서 이레 동안 지극정성 용맹기도 정진하여 삼매 속에서 가피를 얻었다.
34세인 갑오(甲午: 1894)년 동학난(東學亂)에 패하여 쫓겨 다니던 무리들이 조계산으로 숨어들어 산적(山賊)으로 변해 저지르는 온갖 만행을 막아내고, 이를 토벌한다는 경사(京師: 서울)의 약탈(掠奪)부터 사중의 대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35세인 을미(乙未: 1895)년 본사의 청진암(淸眞庵)에 주석하며 강석을 열었다.
36세인 병신(丙申: 1896)년 봄에 지리산 화엄사의 요청으로 봉천암(鳳泉庵)에서 강석(講席)을 여니, 당시의 굉걸(宏傑)한 수재(秀才)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37세인 정유(丁酉: 1897)년 1월에 본사인 송광사의 요청으로 진각국사(眞覺國師)께서 결사하신 도량인 광원암(廣遠庵)에서 화엄경을 강설하니 법중(法衆)이 60여명이나 되어 강당(講堂)이 비좁았다.
그 해 가을 보조암에서 강석을 열고 전법의 인연이 있어서 문제(門弟)인 눌봉(訥峰) 용화(龍化)스님에게 전강(傳講)하였는데, 이것이 제일처전심(第一處傳心)이다.
38세인 무술(戊戌: 1898)년 봄에 방장산으로 들어가 도반들과 금강산을 향하였다. 먼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참배하고 불보종찰 통도사를 참례한 다음 북쪽으로 가다가 경주를 지나 극심한 가뭄을 만나게 되니 도중에 그만두고 사불산과 속리산 계룡산을 거쳐 돌아 왔다. 여름 결제는 방장산 구층대의 염불암에서 겨울 안거는 조계의 삼일암(三日庵)에서 결제 하였다.
39세인 기해(己亥: 1899)년 1월에 해인사에 가서 칙령(勅令)으로 인출(印出)하는 대장경인경불사(大藏經印經佛事)에 동참하여 교정(較正) 편집(編集)의 소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이 인경불사는 안변(安邊) 석왕사의 용악 혜견(龍嶽 慧堅: 당시 69세)스님이 통도사의 보궁(寶宮)과 해인사 장경각(藏經閣)에서 기도를 하며 발원하여 고종(高宗) 황제의 윤지(允旨)로 이루어졌으며, 대장경은 모두 4질(秩)를 인경(印經)하여 삼보(三寶)사찰에 한 질(秩)씩 분봉(分封)하고 한 질은 전국의 사찰에 1부씩 나누어 모시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가운데 한 질(秩)을 본사로 모셔와 6월 5일 설법전(說法殿)의 가상(架上)에 봉안하였다. 그런 다음 곧 서울에 올라가 그동안 관리들의 고폐(痼弊)가 심했던 남여(籃輿)의 부역을 혁파(革罷)하였다.
그리고 시왕전의 각부 탱화를 새로 조성하게 되었는데 그 때 화주의 책임을 맡아서 그 다음해 2월 15일에 봉안하게 되었다.
40세인 경자(庚子: 1900)년 총섭(總攝)의 인수(印綬)를 차고 소임을 맡으면서 각종 관역(官役)의 폐해(弊害)를 혁파(革罷)하고 향탄봉산(香炭封山)을 칙령(勅令)으로 제정(制定)케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니 유교자류(儒敎者流)임을 자처하는 부유배(腐儒輩)들의 뇌리에는 늘 척불훼석(斥佛毁釋)의 용렬한 정신이 들어있어 승려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불교를 탄압하며 사탑(寺塔)이나 불상(佛像)을 훼파(毁破)할 뿐만 아니라, 절 땅에 명당을 찾아 분묘(墳墓)를 쓰기 위해 폐사(廢寺)를 시키기도 하였으며, 관청(官廳)에서는 진상(進上)이나 관용(官用)을 칭탁하면서 주구(誅求)를 자행하였다. 그러다 사원의 재산이 다하거나 승도들의 성력(誠力)이 다하게 될 때에는 사원과 불탑 등을 빈 골짜기에 남겨두고 다른 절로 가거나 환속(還俗)하는 그런 참상(慘狀)이 곳곳에 이루어졌다. 특히 숙종 이후부터 200여 년 동안에 심하다가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이후 신정(新政)부터는 조금씩 덜해졌다. 그런 역사 속에 송광사에서는 관청이나 부유배들의 횡포로부터 사운(寺運)을 유지하기 위해 순조 29년<1829년>에 혜준(惠俊)대사의 알선으로 본산(本山)을 율목봉산(栗木封山)으로 칙정(勅定)하게 되었다. 그것은 종묘나 왕릉 또는 공신(功臣)들의 위패(位牌)를 쓰기 위한 판자를 만드는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칙령으로 그 경계 안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금명스님이 광무(光武) 3년<1899년> 해인사에서 인출한 대장경을 본사에 봉안할 때에 별검 김영택(金永澤)이 말하기를 ‘이제 율목봉산도 칙정된 지가 70년이 지나 그 위광(威光)이 실추되었으니, 송광사를 홍릉(洪陵: 명성황후의 능. 그 때는 청량리에 있었음)에 부속시켜 거기에 쓰일 숯을 공급하는 향탄봉산(香炭封山)으로 주선함이 어떤가?’하므로, 산중의 율암(栗庵) 취암(翠巖) 등 대덕들과 노력하여 송광사 일대가 향탄봉산으로 칙정되었으며, 이 봉산을 보호하기 위한 금폐(禁弊)의 절목(節目)이 14조(條)나 되었다.
당시 순천 관아(官衙)의 통인(通引)들이 사원을 괴롭히는 작난이 극심하였는데, 이 금폐 절목을 적용하여 이를 중앙에 보고하여 이들을 서울로 잡아가서 경무청(警務廳)에서 엄형으로 다스리고 칙지(勅旨)를 받아 계판(啓板)하니, 그 이후로 관청에서 부과하던 갖가지 잡역을 혁파하게 되어 사원의 승려들이 안심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경허(鏡虛)선사가 평소에 흠모하던 보조국사의 도량인 송광사를 방문하였고, 경허선사는 ‘화송광사금명당(和松廣寺錦溟堂)’이라는 칠언율시를 주었다. 그 전해에 해인사의 인경불사가 끝난 다음 칙령으로 해인사에 선원을 개원하였는데, 경허는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의 수행가풍을 이어 수선사(修禪社)라 이름하고 그 법주(法主)가 되었던 것이다.
41세인 신축(辛丑: 1901)년에 회록(回祿)한 도량을 복원한 해남 대흥사에 가서 불사의 증명(證明)법사가 되어 40축(軸)의 복장(腹藏)을 아무 장애 없이 성취하였으며, 이를 봉안하던 날 저녁에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서리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42세인 임인(壬寅: 1902)년 여름에는 경허선사와의 인연으로 해인사 선원에서 결제하였다. 그 때 해인사에서 상궁(尙宮) 천일청(千一淸)이 주선하여 금강계단(金剛戒壇)과 대구품승가리회(大九品僧伽梨會)를 열었는데 거기에 증명으로 참석하였다. 여름 결제가 끝나고 회광(晦光)선사와 천상궁과 함께 본사로 돌아와 삼일선원에 혜시(惠施)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서울 동대문 밖의 원흥사(元興寺)에서 국재(國齋)를 봉행하며 화엄대회(華嚴大會)를 열어 명사(名師)들을 요청(邀請)하여 전국의 고승들이 모였는데 거기에서 현요(玄要)를 담설(談說)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고종황제는 성수망육(聖壽望六: 즉 나이가 60을 바라보게 되는 51세)이 되던 해이니 기로사(耆老社)에 입참(入參)하여 크게 예연(禮宴)을 베풀고 명산의 사찰에 원당(願堂)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그 가운데 송광사가 가장 적합하다고 물망에 올랐다. 금명화상은 상경(上京)한 김에 이 기로소(耆老所) 원당건립을 교섭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 때 마침 대내(大內)가 편안하지 못하여 진행이 어려워 상언장(上言狀)을 서리청(書吏廳)에 제출하고 도봉산 망월사에 거처를 정하고 이 일을 위해 왕래하면서 해를 넘겼다.
43세인 다음해 계묘(癸卯: 1903)년 5월 27일에 내폐(內幣) 10,000냥(兩)의 하사(下賜) 처분을 받고 윤(潤) 5월 6일 연하(輦下)를 떠나 14일에 본사에 도착하여 원당 건립을 시작하였으나 순천 관아에서 온갖 핑계로 미루어 진척이 없으니, 다음 달 6월에 다시 상경(上京)하여 21일에 상서(上書)를 봉정(奉呈)하니 비제(批題)를 내리시고 기로사(耆老社)로부터 군부대신 윤웅렬(尹雄烈)과 탁지부대신 김성근(金聲根)에게 감결(甘結)을 내리니 그 때부터 일을 서두르게 되었다. 7월 2일에 상량문(上樑文)과 액제(額題)와 예폐(禮幣)등에 관해 상서(上書)하니 상량문과 예폐 200냥 성수전(聖壽殿) 만세문(萬歲門)의 사액(寫額)을 받아 9월 14일에 본사로 돌아와 9월19일의 상량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철물(鐵物)과 채색(彩色) 등의 일로 다시 상경하였다가 10월 19일 돌아와서 단청(丹靑)하는 일까지 모두 12월에 완공하였다.
이 원당의 일로 그동안 세 번이나 상서를 쓰고 세 번이나 상경하니 말하기를 ‘불자(佛子)가 본업(本業)에 힘쓰지 않고, 서울에나 드나드는 것은 명리(名利)나 구하는 일이 아닌가?’하므로, 답하기를 ‘불자(佛子)도 신자(臣子)이니 임금을 위하는 일이 본래 불법(佛法)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충군(忠君)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하였다. 당시 혼란스런 조선 말기 부패한 관리들의 적폐와 난적(亂賊)들의 횡포 속에서 민멸(泯滅)해가는 불문(佛門)을 부지(扶持)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송자의 일면을 엿보게 된다.
그 해 12월에 본사의 섭리(攝理) 소임을 맡아 성수전(聖壽殿)에 전패(殿牌)를 봉안하는 일을 계속 주선하여 이듬해 9월에 이를 성취시켰다.
44세인 갑진(甲辰: 1904)년 가을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섭리 소임을 그만두고 물러나 만일암(萬日庵)으로 들어갔다가 광주 무등산 원효암에서 겨울 동안거를 보냈다.
45세인 을사(乙巳: 1905)년 3월에 회광(晦光)선사가 서울에서 송광사로 와서 봉행하는 전경(轉經)불사에 입승(立繩)과 검경도감(檢經都監)을 맡았다. 또 본사에 계단을 설치하여 갈마(羯摩)화상이 되었다.
46세인 병오(丙午: 1906)년 3월에 본사의 시왕계(十王契)에서 예수무차회(豫修無遮會)를 설립하니, 모연(募緣)하는 화주의 소임을 맡아 시주들에게 구재(鳩財)하여 영가(靈駕)를 천도(薦度)하였다.
48세인 무신(戊申: 1908)년에 청진암에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다. 그 때에는 국운이 쇠퇴하여 관기(官紀)가 해이하고 일본의 간섭이 가까워지고 민정(民情)이 자못 소연(騷然)하여 온 나라가 물이 끓듯 하였는데, 지방은 더욱 혼란하여 양정(良丁)과 부민(浮民)들이 서로 어울려 군단(軍團)을 조직하고 의병을 가명(假名)하여 반일의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송광사 인근에 있던 대곡리(大谷里: 지금은 주암호에 침수됨) 출신의 조규화(趙圭和)도 스스로 군졸을 모아 의병대장을 자처하였는데, 그 의추(義酋)들이 차차 폭도(暴徒)로 전화(轉化)하여 대낮에는 숨었다가 밤에는 근처 양민의 재물을 빼앗으며 음주 겁탈 등 만행을 부렸다.
대곡리의 조씨 가문은 이 지역의 토반(土班)으로 부근의 민간인들에게 세력의 자행이 심하였으나,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규화의 백부(伯父)도 두 해전 병오(丙午: 1906)년에 송광사에 들려 성수전(聖壽殿)을 배관하려고 하면서 행패를 부리다가 챙피를 당한 일이 있어 대곡의 조씨들은 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관계 때문에 그 때 의병대장을 자처하던 조규화의 목적은 송광사를 초토화시키는 것이 목적인 듯하였다. 매일 삼삼오오 출입하면서 금품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많은 대군(大軍)을 몰고 와서 스님들을 폭행하고 묶어놓고 매질하니,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해 환속하거나 피신하여 대중이 흩어지고 절은 황폐하여 갔다.
그 해 4월 17일에 조규화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은적암(隱跡庵)에 둔거하고 있었는데, 대곡리의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 이를 탐지할 때 주지 설월(雪月)스님을 불러 사문(査問)하니 명분이 의병(義兵)인지라 일병(日兵)에게 차마 이르지 못하고 ‘전연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다시 정탐을 보내 그들의 둔거를 확인하고는 괘씸하게 여겼다. 4월 18일 밤에 일본 순사 등이 거기를 찾아 발포하여 모두 도망 가버리고 없으니 그들은 은적암과 그 아래의 보조암 두 암자를 불태워버렸다.
7월 1일에 조규화가 다시 80명의 대군을 끌고 와서 본사의 문수전에 본영(本營)을 정하고 주둔하면서 승려들을 구박하고 거금을 요구 하였다. 그 다음날 인근 주암(住岩)에서 온 수비대와 접전하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11월에 조규화의 무리에게 승려가 피살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런 사건 등으로 각 암자와 큰절이 텅 비게 되는 지경이 되었다. 조규화는 그 다음해 목사동 신전리에서 사살되었다. 그 당시의 그런 참화를 겪으면서 본사는 4만여 냥(兩)이 탕진되어 사원의 보존이 어렵게 되었다. <당시에 좋은 논 1두락이 60냥이었다 한다.>
이런 와중에 그 무리들이 송광사를 불태우려고 하는 것을 다송자는 몸으로 막아내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노력을 다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는 뒷날 금명보정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무신년 여름에 한 산중이 병란의 화재를 입게 되어 대중이 모두 달아나버렸는데, 홀로 위험에 당하여도 겁내지 않고 순교할 것을 맹서하였으니, 신령스런 옛 고찰의 도량이 초토(焦土)를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49세인 기유(己酉: 1909)년 봄에 두 벗이 찾아와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며 말하기를 ‘이런 난세(亂世)에 보신(保身)하는 것은 재야(在野)에 숨는 것이 좋으니 함께 세속으로 나가도록하자.’고 하므로, 대꾸하기를 ‘두 형들은 어찌 그럴 줄만 아시오? 나는 이미 입산하여 불자(佛子)가 되었으니 맹서코 산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저런 산적들에게 해를 당할지언정 불자(佛子)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리라. 형들이나 좋게 스스로 도생(圖生)하시기 바라오.’ 하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이 도량을 끝까지 지킬 것을 다짐했다.
49세인 기유(己酉: 1909)년 12월 2일에는 두 해 동안의 병란(兵亂)이 그친 뒤 본사에 사립(私立)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세우고 학감(學監)의 소임을 맡아 학교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후부터 학림이나 강석에서 후학을 가르치거나 혹은 선원에서 안거(安居) 정진하면서 오직 수행과 도제양성에만 전념 하였다.
50세인 경술(庚戌: 1910)년 2월 20일에는 종무원의 일로 서울에 갔다가 3월 21일에 본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풍조(風潮)가 바뀌어 신학문(新學問)을 비판 수용하면서 우리 전통을 잘 보전하여야 한다는 교육 이념으로 세운 송명학교에서 한문(漢文)강사와 불교(佛敎)강사가 되어 몇 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이해 일제에 의해 한일합병(韓日合倂)이 되었다.
52세인 임자(壬子: 1912)년 4월 8일에 본사의 장경전(藏經殿: 지금의 설법전)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립하여 전계(傳戒)화상이 되니 계도(戒徒)들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7월 15일에는 응암(應庵) 선조사(先祖師)의 영정을 새로 영당에 모셨다.
54세인 갑인(甲寅: 1914)년 2월에는 보명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보제당(普濟堂)에 강원을 개설하여 강석에 부임하니 사자(獅子)같은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55세인 을묘(乙卯: 1915)년 3월에는 방장산 천은사에 나아가서 강석에 1년 동안 지냈다.
56세인 병진(丙辰: 1916)년 1월 15일에 해남 대흥사 강원의 요청에 의해 강석을 열었는데, 12종사(宗師)들이 교화하던 곳이라 절의 분위기가 융화(融和)하고 대중들이 번창 하였다. 그 곳은 30년 전 범해스님에게서 고문박의(古文博義) 사산비명(四山碑銘)을 배우고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범망경(梵網經)과 사분율의(四分律儀) 등을 공부하던 곳이며, 15년 전에 복구불사의 증명법사가 되었던 도량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보련각(寶蓮閣)에 모신 범해선사의 영정에 참배하고, 그 문손인 인월(印月)과 완월(玩月)에게서 선사가 남긴 시축(詩軸)을 받고 그 편집을 부탁 받았다.
57세인 정사(丁巳: 1917)년에 본사의 요청을 받아 돌아오니, ‘청춘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했다. 강원과 지방학림(地方學林) 강사를 겸임하였다. 조계산방(曹溪山房)에서 지난해 범해선사의 문손들에게서 부탁받은 범해선사의 시집을 염재거사(念齋居士) 송태회(宋泰會)와 함께 편집하고 범해선사시집후발(梵海禪師詩集後跋)을 지었다.
58세인 무오(戊午: 1918)년 3월에 해은당(海隱堂)에게 전강(傳講)하였으니, 이것이 제이처전심(第二處傳心)이다. 그리고 강원의 강사는 그만두고 지방학림의 강사만을 맡아 1920년 2월 6일에 사임하였다.
60세인 경신(庚申: 1920)년 1월에 그동안 열람했던 저술이나 번역본의 목록을 정리한 ‘저역총보(著譯叢譜)’의 편찬을 끝내고 그 서(序)를 쓰다.
그리고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의 서(序)를 짓고 그 저술을 시작하였다.
4월에 곡성 태안사로 옮겨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하고 겨울은 봉서암(鳳瑞庵)의 염불당에서 결제하였다.
61세인 신유(辛酉: 1921)년 1월 19일은 회갑이 되는 날이었다. 봉서암에서 도제(徒弟)들이 다회(茶會)를 마련하여 수연(壽宴)을 받으시고, 일당(一堂)에 모여 지은 수시(壽詩)를 모아 ‘금명대사수시(錦溟大師壽詩)’ 한 권을 만들어 기념으로 남겨 두었다.
그 해 5월 15일에 송광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아달라고 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말하기를 ‘내가 이미 두 번이나 인수(印綬)를 잡고 수토(水土)의 은혜를 갚았는데, 지금 다시 그 일을 맡게 된다면 어찌 누진(漏盡)하는 비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고사(固辭)하였다.
9월 9일에 ‘불조록찬송(佛祖錄讚頌)’을 찬(撰)하고 서(序)를 짓다.
이 달에 우연히 각기병(脚氣病)이 생겨 열 달이나 고생하였다..
62세인 임술(壬戌: 1922)년 봄의 부처님 열반재일(涅槃齋日: 음 2월 15일)에 오래전에 기산(綺山)스님을 통해 알게 되었던 보조국사 찬술로 알려진 ‘염불요문(念佛要門)’을 열람하고는 문장을 구분하여 해석한 ‘염불요문과해(念佛要門科解)’를 마무리하고 발문(跋文)을 썼다.
이 해 7월에 본사의 강원에서 요청하니 본사의 보제당(普濟堂)에 머물면서 강의를 하였다.
그 후 몇 번이나 물러나고자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아 7년이나 계속 강의하며 살게 되었다.
66세인 병인(丙寅: 1926)년 ‘정토찬백영(淨土讚百詠)’을 찬(撰)하고 욕불일(浴佛日)에 발문(跋文)을 쓰다.
68세인 무진(戊辰: 1928)년 2월에 강원을 법성료(法性寮)로 옮기니 그 곳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3월에 해은당(海隱堂)에게 다시 전강(傳講)하였으니 이것이 즉 제삼처전심(第三處傳心)인 셈이다. 그리고는 다시 보제당의 염불원에 머물면서 정토(淨土)의 업을 닦았다. 8월 15일에 삼존불(三尊佛)을 개금(改金)하고 본당의 벽에 구품도(九品圖)를 그려 많은 사람들이 아미타불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
70세가 되던 경오(庚午: 1930)년 1월에 그 동안 10년을 집필한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을 마무리 하였다. 그 말미에는 스님의 문하에서 수학 수법한 스님들까지 모두 망라하여 그 행장을 적어 실었으며, 그리고 손수 행록초(行錄草)를 작성하여 자기의 평생 살아온 행장을 소소히 기록해 남기었다.
2월에 임종이 가까워진 줄을 미리 아시고 도제(徒弟)들에게 부촉하는 촉루도제문초(囑累徒弟文抄)를 손수 적었으니,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분외(分外)의 일을 구하지 말고 서로 화목(和睦)하기를 부촉하였다. 그리고 선조사(先祖師)와 조상(祖上)들의 제위답(祭位畓)과 도제들에게 나누어 줄 목록들을 낱낱이 상세히 밝혀두었다.
그리고 본사의 보제당에서 2월 13일에 입적(入寂)하였다.
2. 수행과 전법(傳法)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금명스님은 당대의 종장(宗匠)인 경파 경붕 혼해 원화 구련 원해 함명 범해 대 선지식들을 찾아 학문을 연찬하여 불교의 교학 분만 아니라 유교 도교 등 제자백가의 전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제방의 대종장(大宗匠)들에게서 수학한 금명은 은사스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자신보다 더 나은 훌륭한 다른 스님을 찾아 건당(建幢)하라고 권하였으나, ‘오직 마음을 전하는 법이 우리의 가풍일 뿐이오, 다른 것은 도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면서, 은사스님 입적한 다음해에 보조암에서 전등식을 하고 은사스님 아래로 건당을 하였다. 이는 고금에 늘 있어왔던 명성(名聲)을 좇고 세력(勢力)을 따르며 건당을 하거나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면서 계보(系譜)를 바꾸는 부유배(浮游輩)들과 처세를 위해 파맥(派脈)을 조작하는 교사자(巧詐者)들이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금명보정스님의 법계(法系)는 부휴 7세인 풍암세찰→ 응암낭윤→ 영암등찬→ 성월서유→ 지봉지안→ 벽련인성→ 금련경원을 이었으니, 부휴(浮休)스님의 14세(世)가 된다.
스님은 평생 동안에 송광사의 보제당(普濟堂), 보조암(普照庵), 청진암(淸眞庵), 광원암(廣遠庵), 구례 화엄사(華嚴寺), 천은사(泉隱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8처(處)에서 10회(會)의 강연(講筵)을 열었다.
평생 후진 양성을 위해 힘썼던 그의 문하에 많은 준재(俊才)들이 배출되었으니, 조계종정을 지낸 만암 종헌(曼庵 宗憲), 총무원장을 지낸 기산석진(綺山 錫珍) 대강백인 해은 재선(海恩 裁善) 석호 형순(石虎 炯珣) 용은 완섭(龍隱 完燮) 등이 그들이며, 용성(龍城) 학명(鶴鳴) 율암(栗庵)스님 등은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후배들이었다.
그리고 일반 재가자들을 위해 순천과 벌교에 포교당을 열어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고, 송광사와 벌교에 사립(私立)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을 위해 힘썼다.
그리고 틈만 나면 선원(禪院)에서 조사(祖師)의 선리를 참구하며 안거 정진하였으며, 염불원(念佛院)을 개설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근기 따라 정업(淨業)을 닦고 정토(淨土)의 연(緣)을 맺을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근세에 드물게도 송광사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전계화상이 되어 출가자들에게 구족계(具足戒)를 전하니 승보(僧寶)의 비니(毘尼)가 엄정(嚴正)해지고 위의가 청정(淸淨)해졌으며, 불자들에게 범망경(梵網經)을 널리 설하여 대승계(大乘戒)를 전하여 절제(節制)의 재계(齋戒)를 권선(勸善)하였다.
금명선사는 선(禪) 교(敎) 율(律) 정(淨)을 겸전(兼全)하고 삼장(三藏)에 박통(博通)하여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원수(圓修)한 이(理)와 사(事)에 원융무애(圓融無碍) 한 대종사(大宗師)였다.
3. 외호(外護)
선사는 이(理)와 사(事)에 두루 원만(圓滿) 박통(博通) 하였는데, 모든 일을 할 때에 굳은 의지로 과감히 진행하였으며 처음이 있으면 끝을 완벽히 처리하는 성품이었다.
1894<甲午>년에 동학난(東學亂)에 가담하였다가 패배 후에 산적(山賊)으로 변한 무리들이 송광사에 저지르던 온갖 횡포와 토벌하러 온 경사(京師)의 약탈로부터 절을 지켜왔다.
1899<己亥>년 39세에 송광사의 총섭(總攝)의 소임을 맡아 폐단(弊端)이 심한 관역(官役)을 혁파(革罷)하기도 하고, 1908<戊申>년 병선(兵燹)의 와중에서 몸소 재앙을 막아내면서 가람을 지켜내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시대를 헤쳐 나가면서 향탄봉산(香炭封山)과 기로사의 원당(願堂) 건립을 주선하여 관청의 학정(虐政)과 주구(誅求)로부터 본사의 안정을 되찾았다. 실로 다송자는 평생 동안 변혁되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신(渾身)의 정을 다 하면서 휘청거리던 송광사를 지켜낸 외호자이기도 했다.
4. 편록(編錄)과 저술(著述).
다송자는 평생 동안 수집하고 열람한 많은 자료들을 낱낱이 정리해 두었다가 그를 바탕으로 말년에 이를 편록과 저술로 남겼으며, 이는 한국불교전서에 고스란히 수록되었다.
이는 한국불교전서에 수록된 찬술자 가운데 선문염송을 편찬한 송광사 제2세(世)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다음으로 방대한 분량이다.
너무나 많은 분량이어서 몇 곳에는 오류가 있기는 한데 그것은 당시에 유통되던 자료의 정확성에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남긴 저술은 불조찬영(佛祖讚詠) 1권, 시고(詩稿) 3권, 문고(文稿) 2권, 정토찬백영(淨土讚百詠) 1권이며, 편록(編錄)은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 1권, 저역총보(著譯叢譜) 1권, 석보약록(釋譜略錄) 1권, 삼장법수 1권, 염불요해 1권, 속명수집 1권, 지장경과 능엄경과도(楞嚴經科圖) 대동영선(大東詠選) 질의록(質疑錄) 수미산도(須彌山圖)와 백열록(栢悅錄) 등이 있다. 그의 저술과 편록은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동국대학교출판부) 제 12책의 316page부터 783page까지 468면(面)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한국불교전서에 수록된 순서별로 간략하게 살펴본다.
⓵불조록찬송: 인도의 석가모니에서 시작하여 해동의 조계종사들 까지 451조사에 대해 한 분마다 시 한편을 지어 찬송한 연작시(連作詩)이다. 생몰 연대나 간략한 소개가 곁들어 있다. 1921년부터 찬술하였다.
⓶정토찬백영: 백암(栢庵)노사의 정토백영(淨土贊百詠)을 본받아 운(韻)을 빌려서 지은 총 99수(首)의 찬송인데, 1926년에 완성하였다.
⓷보살강생시천주호법록(菩薩降生時天主護法錄): 보살강생은 부처님이 탄생할 때에 천주(天主)들이 호법하던 내용에 관한 기록인데, 부처님의 일대기에 관한 약술이다.
⓸질의록: 자연 사물의 현상에 대한 당시 과학적인 사고(思考)의 여러 변설(辨說)을 모은 것이다.
⓹조계고승전: 대조계종주(大曹溪宗主) 불일보조국사로 시작하여 조계산문을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386명의 고승들을 위주로 편찬한 전록(傳錄)이다. 전기(傳記)가 있는 분이 97명이며 전기 없이 이름만 수록된 분이 289명이다.
⓺염불요문과해: 불일보조국사의 저술이라고 전해온 것을 기산(綺山)스님에게서 얻어 보고는 감격하여 거기에 대한 과목을 나누고 주해를 한 것이다. 1922년에 마무리 했다.
⓻저역총보: 강의 자료를 위해 수집하여 자기의 책상에 두고 참고하려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의 저술목록이 1200여, 한국일본 저술이1200여, 비명찬술부 근 700, 삼장역범(三藏譯梵) 즉 불경 번역 명(名)이 1200여 제(題)나 된다. 방대한 분량이라 내용에 약간의 착오가 있기도 하다.
⓼백열록: 송무백열(松茂栢悅: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은 승(僧)과 속(俗)의 좋은 글을 모아 기뻐한다는 뜻. 추사, 다산, 정조(正祖)의 글과 당대의 여러 고승들의 시편 100여 수를 모아 정리 한 것이다.
⓽대동영선: 한국 중국 일본의 승려들의 시를 모은 것으로 총 370여 수나 된다.
⓾다송시고: 다송자의 시집(詩集). 총 3권으로 11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10 수의 연작도 더러 있다. 우리나라 역대의 승려들 가운데 가장 방대한 분량의 시집이라 할 것이다.
⓫다송문고: 다송자의 문집(文集)이다. 246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사찰의 중수문(重修文) 계안문(契案文) 공덕기(功德記) 모연문(募緣文) 서간문(書簡文) 서(序) 기(記) 제문(祭文) 등 다양하고 방대한 분량이다.
그리고 다송문고의 끝에 부록으로 다송자 자신의 행장을 정리한 ‘행록초’와,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지인(知人)들 94수(首)의 수시(壽詩)를 모은 ‘금명대사수시’와, ‘금명선사비명병서’가 실려 있다.
5. 방대한 송광사 사료(史料)의 수집(蒐集)과 정리(整理)
다송자의 위업 가운데 손꼽히는 것은, 30여 년 동안에 걸쳐 개산(開山) 이래(以來) 묻히거나 산재해 있던 송광사에 대한 사료(史料)를 발굴하고 수집하였으며, 사적(史蹟)은 크고 작은 것이나 오래되고 가까운 것들을 종합하여 대강(大綱)은 물론 섬세한 것도 모두 기록하고 서(序)하면서 사승(史乘)을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것을 기산(綺山)스님이 건물(建物) 인물(人物) 산림(山林) 잡부(雜部)의 네 책(冊)으로 일목요연하게 잘 편집하였고, 이를 제자 용은(龍隱)이 달필로 정서(整書)하여 ‘송광사사고(松廣寺史庫)’를 이룩했으니 사찰의 사료(史料)로서는 가장 잘 정리 보전된 본보기가 되었다.
그 뒤에 기산스님이 다시 정사(正史)를 뽑아 1965년에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지(大乘禪宗 曹溪山 松廣寺誌)’를 발간했으니, 그것은 제대로 된 현대판 사지(寺誌)의 효시가 되었다.
오늘날 송광사가 이처럼 승보종찰(僧寶宗刹)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사의 방대한 사료 수집과 정리의 공적이 크다고 하겠다.
6. 조계종 종통(宗統)의 재정립.
금명선사의 공적 가운데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은 조계산문을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법통을 확립한 것이다.
불교가 번창하던 중국에서도 법통과 종조의 문제는 늘 있어왔던 것으로, 특히 남종선(南宗禪)에서 법통을 강조하여 왔다.
중국의 남종선 계열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구산선문의 조사들도 초기에는 전등(傳燈)의 연원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몇 대를 내려가면 거의 정리가 되지 않고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으며, 특정 종파나 산문의 법통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⓵수선사의 변천과 해동조계종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조계산문의 종조가 되고 16국사를 면면히 배출하면서 이 산문에서는 종풍과 법통이 저절로 대강 정리되어 있었다.
조계산문도 조계산에만 국한 되지 않고 그 외연이 확대 되었다.
고려 항몽 때에 강화도에 천도하고 선원사(禪源社)를 건립하여 수선사(修禪社)의 분원(分院)으로 삼으면서 4세 사주(社主)인 진명국사(眞明國師) 혼원(混元)을 선원사 1세 주지로 삼아 수선사의 승려들이 주지를 이어갔다. 무신정권 시대에 선원사는 고려후기 불교계를 주도하면서 전국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서 근본도량인 수선사는 송광사(松廣社) 또는 동방제일대가람(東方第一大伽藍) 송광사(松廣寺)로 불러지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6년<1396> 정월에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침(陵寢) 동쪽에 새로 지은 흥천사(興天寺)를 수선본사(修禪本社)로 삼고 조계종(曹溪宗)의 본사(本寺)로 칙정(勅定)하였으며, 송광사의 주지를 지낸 혜암상총(慧庵尙聰: 1376년 경 재임)선사를 그곳의 제 1세 주지로 삼았다.
그 때 상총은 왕조의 비호(庇護)아래 만반을 경장(更張)하려고 하면서 상소(上疏)하기를 “이미 본사로 정했으니 그 서울과 지방의 명찰은 마땅히 송광사의 제도를 본받게 해야 하며, 모두 본사의 소속으로 삼아 서로 규찰하게 하면 작법하고 기도하는 일에 비록 쇠퇴하려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근래의 작법하는 규정이 모두 중국의 승려들이 하는 것을 사모하여 그것이 온전하게 되지 못하였으니, 소위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강아지 비슷하게 그리고 말았다.’고 할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광조사(松廣祖師: 보조스님)의 유제(遺制: 戒初心文)를 강의(講義)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고 기록하여 상법(常法)으로 삼게 하여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훈수(薰修)하게 하면 전하(殿下)의 홍도지은(弘道之恩)에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복망(伏望)하오니 이를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하여 흐트러짐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국가에 만 가지 이익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를 따르게 하였다.
이는 보조 지눌이 정혜결사로 수행의 삼종문(三種門)을 세운 이래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불교 수행법이 지눌의 영향 아래 있었음에도 중국에 가서 이어온 임제종 법통을 강조하거나 중국풍의 청규들을 모방하려는 당시의 풍조를 비판하고 조선불교의 승단에서는 보조스님의 가르침을 훈수(薰修)하여 해동불교에 걸맞는 수행가풍을 수립하여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조선 불교의 정체성(正體性)은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종조(宗祖)로 모시는 해동의 조계종(曹溪宗)임을 중외(中外)에 천명(闡明)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흥천사(興天寺)는 1424(世宗6)년 예조(禮曹)의 계(啓)에 따라 7종파(宗派)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두 종파로 통폐합할 때,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 등 세 종파를 단일화 하고 선종의 도회소(都會所: 總本寺)가 되어 모든 종무(宗務)를 집행했다
⓶ 임제종 법통의 의정
조선(朝鮮)은 개국공신(開國功臣)들에 의해 성리학(性理學)이 통치이념으로 되어 억불숭유의 정책이 펼쳐지면서 뒷날 불법사태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법통이 거의 인멸(湮滅)되었다가, 명종 때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불교가 잠시 중흥하다가 집권실세인 유생들의 모함으로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임진(壬辰) 정유(丁酉)의 왜란(倭亂) 때에 승군(僧軍)의 활약으로 다시 그 위상이 조금 높아지니,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면서 그 법통은 법안종(法眼宗)과 보조(普照) 나옹(懶翁)의 계통으로 전전(轉轉)했다. 그러다 서산 휴정(西山 休靜)이 돌아간 뒤에 그 문도들에 의해 조선불교의 중흥조 격인 부용영관(芙蓉靈觀)의 스승인 벽송지엄(碧松 智嚴: 1464~1534)의 법계를 태고(太古)의 법통으로 꿰어 맞추면서, 행장(行狀) 자체도 애매한 벽계 정심(碧溪 淨心: 生沒年代未詳)에다 부회(附會)하여 기형적인 법통의 구조(構造)가 되고 말았다.
선종의 법통은 입실(入室) 면수(面授)의 인가(認可)를 생명으로 여긴다면서도, 조선 전기에 과연 그런 전통이 제대로 몇 대를 이어져 오고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서산스님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오종(五宗)의 가풍(家風)을 말하면서 임제종(臨濟宗)이 육조(六祖)혜능(慧能)대사의 직전(直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산스님은 그의 법계(法系)가 벽송지엄의 법손임을 밝혔을 뿐이었고 그 이상은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 후대의 제자들이 의정(議定)하여 중국의 석옥 청공(石屋 淸珙)에게서 수법(受法)한 태고 보우(太古 普雨)의 법맥으로 잇게 되었던 것이라 한다. 의정(議定)이란 의논하여 정하는 것으로 불확실 할 때에 의결하여 선택하는 것이다. 태고는 중국 남종선의 가풍을 따라 개당(開堂)할 때에 염향(拈香)하면서 임제종의 석옥선사로부터 전등(傳燈)하였음을 밝히었으니, 태고의 법맥에 줄을 대는 것이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암 혼수(幻庵 混修)와 구곡 각운(龜谷 覺雲)과 법맥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아직도 미결인 채로 갑론을박을 계속하고 있으며, 벽계 정심(碧溪 正心)이라는 인물의 정체도 모호한 상태이다.
이런 현상은 그 법맥과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고민이 엿보이는 것이지만, 바로 상총선사의 소문(疏文)에서 우려했던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강아지를 그린 모화승(慕華僧)들의 작태(作態)가 되고 만 것이라 할 것이다.
그 이전에 고려의 보조지눌은 대혜의 영향으로 해동에 처음으로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였고, 그 제자인 진각혜심은 역대 조사(祖師)들의 문답과 기연을 모은 해동 최고의 선서(禪書) ‘선문염송(禪門捻頌)’ 30권을 편찬하였으며, 조사의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간화선의 지침이 되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간화선의 병통과 치유법을 상세히 밝히면서 그 수행의 자량(資糧)을 삼게 했다.
그리고 수선사 10세 혜감국사(慧鑑國師) 만항(萬恒)은 중국의 몽산 덕이(蒙山 德異) 선사와 교류하면서 몽산으로부터 고담(古潭)이라는 아호(雅號)를 받았고 그의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에는 몽산의 간화선법도 새롭게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간화선의 수행방법이 조계산문 수선사를 중심으로 당시 고려(高麗)의 수행자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으며, 태고(太古)스님도 이 수행방법으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던 것이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은 거의 중국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스승들의 계도(啓導)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 그 법통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태고보우는 보조스님이 고려불교에 새롭게 제창했던 경절문(徑截門)의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바탕으로 수행하면서, 간접적으로 중국의 몽산(蒙山)선사와 그의 제자인 철산(鐵山)선사와 손제자 무극(無極)선사의 선풍과 그리고 고봉(高峰)선사와 그제자인 중봉(中峰)선사의 영향도 받아 석옥을 친견하기 이전에 이미 대오하였다. 태고는 석옥 아래에서 수학하여 깨친 것이 아니라, 깨달은 뒤에 자기를 시험하기 위해 중원(中原)의 대종장(大宗匠)으로 알려진 석옥을 찾아가 만나자마자 먼저 지어온 태고암가를 보이면서 즉시 상통(相通)하여 인가(認可)를 받은 것이다.
나옹 혜근(懶翁 惠勤)도 임제종의 평산 처림(平山 處林)을 만나러 가기 전에 간화선을 통하여 오도(悟道)하였고, 평산을 만나 수작(酬酌)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나옹이 더 활발발(活潑潑)하였다.
그러나 나옹은 상통했던 평산보다는 중국 연도(燕都)에서 친견한 인도(印度)에서 온 지공(指空)화상(和尙)을 스승으로 모시었던 것이다.
백운경한(白雲景閑)도 석옥에게서 인가를 받았으나, 지공선사에게도 ‘제자는 향을 사르고 백 번 절하옵니다. 제자는 숙세에 훌륭한 종자를 심어 스승님께서 나오신 때를 만나 이렇게 뵈올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어느 한 종(宗)의 이념을 뛰어 넘고 격식을 벗어나 활구(活口)를 온통 드러내셨습니다.’ 하면서 스승의 예로 모셨다.
지공은 인도의 나란다에서 수학하고 스리랑카의 도명(道明)존자에게서 수법한 108대(代) 조사로 티벳과 중국을 거쳐 고려의 금강산과 회암사 통도사 등도 참배하였던 활불(活佛)로 알려진 분이었다.
최근 월정사에서 발굴된 ‘조선국 강원도 오대산 진여원의 3차 중건 대동참 발원문’에는 서천(西天) 108대 조사로 알려진 지공(指空)선사의 법손임을 자처하는 내용이 나왔다.
그 발원문의 말미(末尾)에 “각각 원을 맺어 기쁘게 시주한 자와 인연 화주인 비구들이 모두 생전에 늘 병이 없고 사후에 곧바로 연화세계에 오르기를 기원하노라. 순치 17년 경자<1660년> 5월 초사흘, 서천 제119대인 청허의 문손이요 편양의 제자이며 장개후인(將開後人) 지경환적 청공자 의천은 삼가 쓰다.<各各結願, 隨喜施主, 与緣化比丘朩, 生前永無病患, 死後直上蓮花之願. 順治十七年庚子五月初三日 西天一百十九代 淸虛之孫 鞭羊之子 將開後人 智鏡幻寂 淸空子 義天謹書>”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 초에 형성되어 아직까지 모든 불사에 보편적으로 증명단의 법사로 호칭하는 “증명법사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삼대화상”의 지공이 서천의 108대 조사이니 그 법손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나옹은 중국 임제종의 평산처림 선사에게서 인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공을 법사(法師)로 모셨으며, 조선 초의 불교계를 주도했던 나옹의 후손들도 그것을 자부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중국선종의 법통에 연연하던 모화(慕華)의 사대(事大)에서 벗어나 멀리 서천으로부터 고려까지 방문하였고 고려의 나옹에게 법을 전한 서천의 108대조사인 지공의 법통을 이은 서천의 119대임을 떳떳이 밝히는 것이라 주목된다.
1764년에 사암 채영(獅巖 采永) 등이 전주(全州)의 송광사에서 여러 대덕들과 모여 법맥을 의정(議定)하여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를 간행하였다. 그런데 의정(議定)하면서 거기에 실린 법통이 조작되었고 청허(淸虛) 문하의 중심으로 치우쳐 만든 것으로 부휴파(浮休派)는 소홀히 다룬 것이라 문제점이 많았다. 불확실한 것을 서로 뜻을 모아 결정한다는 것은 정확한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해 가을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의 벽담 행인(碧潭 幸仁: 1721~1798)이 이를 꾸짖고 그 판본을 불태워버렸다. [벽담 행인(碧潭 幸仁)이 전주의 송광사에 갔을 때 거기에 마침 수계(受戒)제자가 있어 그 거사(擧事)를 알고는 판전(版殿)에 모셨던 전패(殿牌)들은 모두 밖으로 들어내고 불을 질렀다 한다. 뒤에 채영 등이 대역죄로 고변하였으나 행인이 ‘불조원류라는 것이 나라의 내탕금(內帑金)으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허위 날조된 것이므로, 이를 불태운 것은 뒷날에 거짓이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대역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전패들을 밖으로 모셔내고 불을 질렀겠습니까?’ 하니, 방면되었다 한다<翠峰스님의 傳言>. 벽담은 뒤에 청허 문손들의 중심 사찰인 대흥사에서 1775년 법주가 되어 13대 강사 가운데 한 분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임란 이후에는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사대모화(事大慕華)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되었던 중국의 임제종 법통임을 주장하는 흐름이 조선 후기 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朝鮮)에서 주자(朱子)를 추종하는 아류(亞流)들인 유생(儒生)들이 어느 누구도 주자가 살던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건양(建陽)이나 무이산(武夷山)을 가본 일이 없으면서도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 따서 많은 가곡(歌曲)을 모창(模唱)하던 것이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 속에서 중국불교를 순례하며 익힌 일도 없고 임제(臨濟)선사의 사상이 담긴 임제록(臨濟錄)을 한 번도 간행한 일이 없으면서도 중화의 임제종 법통 일색으로 답습(踏襲)하려던 조선 승려들이 가졌던 소중화(小中華) 사관(史觀)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고 취급하던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淸)이 중국을 지배할 때에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에만 매달려온 고루(固陋)한 조선 후기의 유학자(儒學者)들이 연대(年代)를 표시할 때 명말(明末)의 의종(毅宗) 때 연호(年號)인 숭정(崇禎: 1628~ )을 기원(紀元)으로 삼아 계속 써온 것과 같이 궤(軌)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조선 사회의 문화흐름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금명 자신도 철저히 조계산문 보조의 수행 가풍을 따르면서 법통을 말할 때에는 이 두찬(杜撰)의 불조원류(佛祖原流)에 근거하여 계륵(鷄肋)처럼 임제종의 법통이라고 하기도 했다.
⓷ 한일합병과 종명(宗名)
1895년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계의 노력으로 조선시대 불교탄압의 상징인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리고 1910년 강제로 한일합병이 되면서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연합하려는 이회광(李晦光)이 중심이 된 원종(圓宗)을 저지하기 위해 동년(同年) 10월 5일 광주 증심사에서 회의를 열기로 했으나 사람이 적어 유회(流會)되고, 이듬해인 1911년 1월 15일에 영남과 호남의 승려를 모아 순천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발기하고 송광사에 임시종무원을 설치하여 선암사의 경운 원기(擎雲 元奇: 1852~1936)스님을 관장으로 한용운스님이 관장대리로 선출되었다. 다음해인 1912년 6월에 총독부에 의해 조선선교양종종무원(朝鮮禪敎兩宗宗務院)이 설립되고 총독부는 ‘조선불교계는 더 이상 임제종을 내걸어서는 안 된다’며 관권을 동원하여 임제종의 활동을 제지하고 원종과 임제종의 간판을 모두 내리게 되면서 종통에 대한 시비는 일단 수그러들었다.
⓸ 동사열전의 영향
그 동안 해남 대흥사의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동사열전(東師列傳)을 1894년에 마무리 지었는데 6권 2책으로 총 199명의 고승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범해는 그 자서전(自序傳)에 이르기를 “불교가 전성기에는 도첩(圖帖)이 있고 승과(僧科) 승관(僧官)이 있었으며 역사(歷史)와 전기(傳記) 등이 있었으나 병란을 거치면서 공사의 문서들이 참고하거나 믿을만한 것이 없어졌다. 비록 비갈(碑碣)이 남아 있어도 이끼에 침식(侵蝕)되어 상고하기 어렵고 불조원류(佛祖源流)가 있기는 하지만 중간에 수록하면서 명호(名號)를 부회(附會)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되니, 내가 학인들과 문답하는 여가에 동국 선사들의 시대 별로 일어난 일을 모우고 선각(先覺) 후각(後覺)들의 잠(箴)을 갖추면서, 또한 그 보계(譜系)와 파계(派系)를 간략하게 저술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범해선사는 그의 동사열전 권4 마지막의 자서전(自序傳) 말미(末尾)에 “만약 근거 없는 이야기나 빠뜨린 것이나 잘못된 것이 있다면, 가필하거나 삭제하여도 무방하다<若有浮談落漏詿誤處 隨處筆削無妨>”고 하여, 뒷사람들이 이를 알면 첨삭(添削)해도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금명은 26세인 1886년 대흥사의 범해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고 그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동국계맥을 이었으며, 그리하여 범해 입적후에 보은(報恩)의 마음으로 41세인 1901년 해남 대흥사에 가서 회록(回祿)한 도량을 복원한 불사의 증명(證明)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56세인 1916년 해남 대흥사의 보련각(寶蓮閣)에 모신 범해선사의 영정에 참배하고 그곳에 강석(講席)을 열었으며, 그 문손들로 부터 선사가 남긴 시축(詩軸)의 편집을 부탁 받고는 그 이듬해 본사로 돌아와 1917년 초여름 조계산방(曹溪山房)에서 염재 송태회와 함께 범해선사의 시집 편찬을 마치고 ‘범해선사시집후발(梵海禪師詩集後跋)’을 지었던 것이다.
금명은 그 동안 범해스님이 남긴 여러 저술들을 보면서 동사열전(東師列傳)은 오종(五宗)이나 구산(九山)의 구별 없이 다루었지만 조계산문의 고승들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많이 누락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동사열전에서 조계산문의 출신들이 많이 누락된 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 그 당시 범해선사 혼자 수집하게 된 자료의 한계이기도 했으니, 금명은 이를 잘 이해하였기에 보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⓹ 조계고승전의 편찬
금명은 그동안 중국 임제종 법통으로 의정(議定)한 두찬(杜撰)의 불조원류(佛祖源流)를 송광사 벽담행인이 이를 불살라버린 역사를 알고 있었고, 일제에 의해 조동종과 연합한 원종(圓宗)이 만들어지면서 이에 저항하여 임제종을 발기하여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하였던 일과 총독부에서 다시 조선선교양종을 설립하여 조선불교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금명은 풍암조사부도봉안비전기(楓巖祖師浮屠奉安碑殿記)에 “임제 아래~~ 태고의 6세에 부용이 있고 부용의 아래에 청허와 부휴로 두 갈래져서 각기 종풍을 펼쳤는데, 부휴의 적손(嫡孫)으로 전등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조계(曹溪)가 가장 왕성하였다<臨濟之下~ 太古六世有芙蓉 芙蓉下有淸虛浮休兩枝 各播宗風而唯浮休之下嫡孫 燈燈不絶者 獨曹溪最盛也>”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조국사의 비전(碑殿)에다 부휴 이하 역대 조사의 탑들을 모시고서 “우리 조사의 탑들은 비전을 여의지 않으니 이미 보조를 우러르고 보조를 여의지 않으며 항상 비전에 머문다<吾祖之塔 不離碑殿 已昇普照 不離普照 常住碑殿>”고 하였다
금명 자신도 조선불교의 법통이 중국의 임제종이라는 최면(催眠)에 걸려있었고 보조국사를 산성(散聖)으로 치부했던 불조원류를 계륵(鷄肋)처럼 여겨왔던 것인데, 구산선문을 융화하고 선교양종을 회통한 보조국사의 원융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임제종풍도 조계종으로 융합시켜 우리 불교의 본색을 찾아 정리하여야겠다는 자각(自覺)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금명은 고려 말부터 면면히 이어지온 조계산문 개산조인 목우자의 수행가풍의 정체성을 되살려내고 그동안 단절되거나 흩어져있던 인물들의 전기를 편찬하여 조계종이라는 끈으로 엮어서 그 역사를 정립할 사명의식을 절감(切感)하고 조계고승전을 편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그동안 수집한 많은 기록들을 정리하며 그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 서문(序文)에 “조계산의 개산조인 불일보조국사는 구산(九山)의 장벽을 허물고 선종 교종의 여러 파류(派流)를 융합하여 조계종을 세웠으니, 구산이 일도(一道)가 되고 양가(兩家)는 일종(一宗)이 되었다. 조계종의 취의(趣義)는 넓고도 큰 것이니, 그 약록(略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조계종의 창주(創主)에서 시작하여 그 파류(派流)들까지 낱낱이 군편(群篇)에서 열람하여 어느 산(山)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이 조계종에 관계되는 분들은 모두 넣어 기록하면서 명장(銘狀)이 있으면 약록(略錄)하고 없으면 이름만 열거하였다. 지금도 살아 있는 명승(名僧)들은 본인들에게 물어 기록하면서 후생들을 기다린다. 그러니 이것은 당(唐) 송(宋) 신라(新羅) 고려(高麗)의 문장사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바라는 것은 종주(宗主)께서 벽을 허물고 종(宗)을 세운 그 은혜에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도 보답하기 위함이니, 이후에도 이 전등의 기록이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조계고승전은 구산(九山)의 장벽을 허물고 선교의 융합을 이루어낸 보조국사 지눌(知訥)을 정점으로 한 16국사와 전대(前代)의 고승 몇 분과 지눌이 정립한 삼종문(三種門)인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수행법에 영향 받아 깨침을 이룬 간화선의 종장들인 나옹(懶翁)과 태고(太古) 등을 포함한 조계산문 종풍과 관계되는 고승들과 그 후예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조계종주불일보조국사전(大曹溪宗主佛日普照國師傳)을 시작으로 16국사를 비롯하여 보조(普照)국사 이전의 몇 분도 실려 있는데, 법칭(法稱)이 조계종(曹溪宗) 모모국사전(某某國師傳), 조계종 모모선사전(某某禪師傳)이라 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는 명칭을 먼저 쓰다가, 부용영관(芙蓉靈觀)선사 이후로는 조계종사(曹溪宗師) 모모선사전(某某禪師傳)이라 하여 조계종사(曹溪宗師)라는 호칭을 먼저 붙여 쓰고 있다. 그러다 말미에 가서 예운(禮雲)선사부터 마지막 용은(龍隱)선사 까지 14인은 조계종 모(謀)선사라 하였는데, 이들은 다송자의 제자들이거나 본인보다 10살 이하의 연하(年下)의 사람들이다.
여기에 수록된 인물은 총 380여명인데, 전기가 있는 고승은 97명이다.
그런데 ‘조계종의 취의(趣義)는 넓고도 큰 것이라’ 하면서도 부휴 계열 가운데서도 풍암 세찰(楓巖 世察) 법손들 위주로 전기(傳記)를 편찬되었으며, 그 서문에 “이 고승전은 다만 조계산의 고승전이다<唯此傳者 但曹溪山之高僧傳也>”이라 하여 조계산문 출신의 고승전임을 밝혔다.
아마도 조계산문 밖의 고승들은 동사열전(東師列傳)에 기록되어 있으니 중복되는 것을 피하려고 한 것이거나, 아니면 말년에 혼자서는 그 방대한 분량을 다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 때문일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당시에 아직도 임제종의 적손(嫡孫)이라고 고집하는 청허계(淸虛係)의 사람들과의 논쟁을 피하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조계고승전은 금명이 말년에 송광사 보제당(普濟堂)에 머물면서 10년에 걸쳐 정리한 것이며, 입적(入寂)하기 한 달 전인 1930년 1월에 마친 시대정신이 깊이 배어있는 혼신(渾身)의 역작(力作)이었다.
범해의 동사열전에 영향 받은 금명의 조계고승전은 비슷한 형태의 두 저술로 사자(師資) 사이에 서로 36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동사열전이 조선말 1894년에 완성된 것이라면 조계고승전은 일제(日帝)시대에 편찬된 것이다.
그동안 조선 말기의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 동학(東學) 잔적(殘賊)들의 횡포와 관역의 폐해(弊害)와 무신(戊申: 1908)의 병선(兵燹) 등으로 송광사가 존폐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는 것을 몸소 겪었고, 한일 합병 후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 불교계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소용돌이를 그의 생애(生涯) 동안에 겪어오면서 이 산문의 지도자로서 이 산문의 구종(救宗)을 자각(自覺)하는 시대의식이 이를 저술하게 만든 것이다.
그 가운데 약동하는 편저(編著)의 의도(意圖)와 저술정신은 송광사가 해동불교의 승보종찰이라는 긍지와 조계산문의 개산조인 보조국사를 정점으로 한 조계종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가늠케 한다.
다송자 그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⓺ 원융 회통의 상징인 조계종 종통의 정립
금명은 조계고승전을 편록(編錄)하면서 아울러 1921년부터 불조록찬송(佛祖錄讚頌)을 지어 고승전과 서로 짝이 되게 하여 보완하였다.
불조록찬송은 먼저 석가모니부처님과 서천(西天)의 28조(祖)와 동토(東土: 中國)의 89조사(祖師), 화엄역저송제사(華嚴譯著誦諸師 86분, 해동신라열조(海東新羅列祖) 22분, 구산조사(九山祖師) 9분, 해동열조(海東列祖) 112분에 대해 찬송하였다.
그리고 뒤에 따로 조계산문을 열어 구산(九山)의 장벽을 허물고 선종(禪宗) 교종(敎宗)의 여러 파류(派流)를 융회(融會)하여 해동의 조계종을 세운 조계종주(曹溪宗主) 보조국사를 위시하여 조계종사(曹溪宗師) 105분에 대해 공경을 다해 찬송하였다.
이것은 조계종이 인도와 중국의 선종조사들과 화엄종의 조사들과 구산선문 이전의 해동 열조들과 구산선문의 조사들과 그 후의 해동열조들을 널리 융섭한 결과로 형성된 종문이며 그 성립 배경을 기술한 것이라 할 것이다.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한 갈래에 매달린 법통(法統)주의를 지양(止揚)하고 선(禪)으로 계정혜(戒定慧)를 모두 거두어 갖춘 원융한 종풍으로 정립시키고 선교(禪敎) 현밀(顯密)을 회통한 보조국사의 대승선종(大乘禪宗)의 사상을 표방한 것이다.
이리하여 조계종이 선교(禪敎)를 원융회통(圓融會通)한 불교의 종파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 조계고승전과 불조록찬송은 다송자 한 분에 의해 이룩한 것이라 그 자료 수집의 한계와 편성에 약간의 미흡함이 있지만 승보종찰 송광사의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 조계종이 선교(禪敎)의 역대 열조(列祖)들을 모두 망라(網羅)하여 회통(會通)한 것임을 천명한 것이며, 나아가 지금 구산선문 이전의 열조들을 배제하고 선종의 조사들에게만 매어 있는 한국불교 조계종의 종사관(宗史觀)과 대비되는 것으로, 그 제시하는 바가 큰 아주 중요한 저술이라 할 것이다.
7. 다송자와 범해
금명은 26세 되던 병술년(1886년)에 해남의 대흥사로 범해(梵海)선사를 찾아가서 고문박의(古文博義)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을 배우고 이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범망경(梵網經)과 사분율(四分律) 등도 배웠다.
그런 인연으로 41세인 1901(辛丑)년에 범해가 돌아간 뒤 큰 화재를 입었다가 복구한 대흥사 불사의 증명(證明)이 되기도 했고, 56세 되던 1916<丙辰>년에는 거기서 강석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1916년 겨울 대흥사에 장춘강원(長春講院)에 있을 때, 범해의 법손들이 4편 2책으로 된 유고(遺稿)를 보이며 이를 편집하여주기를 간청하였다.
범해의 문손들도 금명이 범해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 시문집의 편찬을 의뢰하였을 것이다.
이듬해 정사(丁巳: 1917)년 봄에 범해의 유고를 송광사로 가져와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와 함께 편집하고 그의 제자 용은 완섭(龍隱 完燮)을 시켜 이를 정서하여 범해선사집(梵海禪師集)을 만들었다. 서문(叙文)은 송태회가 쓰고, 행장은 범해의 수법제자인 송광사 율암(栗庵)이 썼으며, 발문(跋文)은 다송자가 썼다.
* 범해선사문집의 말미에 있는 정사년 3월에 조계산의 율암 찬의(栗庵 贊儀)가 썼다는 범해선사행장(梵海禪師行狀)은 금명의 다송문고(茶松文稿)에 찬자(撰者)의 이름 없이 그대로 실려 있다. 다송자가 시문집을 편집하면서 범해의 행장을 지어 자기보다 6살 후배이면서 범해의 수법제자이기도 한 송광사 섭리(攝理: 住持)를 지낸 율암의 이름으로 가탁(假託)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송자는 송광사에 계단을 설치하고 ‘수보살계첩(受菩薩戒牒)’에 “해동의 총림에서는 실낱처럼 매달린 은참(隱讖)을 지켜오다가, 이에 대은(大隱) 율사가 광명의 계상(戒相)을 간절히 구하였고, 동방(東方)의 계림(戒林)은 초의(草衣)에서 분방(芬芳)했으며, 접역(鰈域)의 선파(禪波)는 범해(梵海)에서 다시 맑아졌다”고 하면서 계맥(戒脈)의 연원을 대은→초의→범해→금명으로 전해온 것임을 밝혔다. 금명은 범해선사시집의 후발(後跋)에 스스로 조계산계생보정근서(曹溪山戒生寶鼎謹書)라 하여 범해로부터 계맥을 이어 받은 문생(門生)임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범해가 직접 쓴 그의 ‘자서전(自序傳)’과 송광사 율암(栗庵)의 이름으로 쓴 범해선사 행장에서 밝혔듯이 “교(敎)는 계정 원응(戒定 圓應)에게 전하고, 선교(禪敎)를 아울러 전한 것은 혜오 취운(慧悟 翠雲) 서해 묘언(犀海 妙彦) 금명 보정(錦溟 寶鼎) 율암 찬의(栗庵 贊儀) 등이다”고 하였다.
다송자는 범해선사집의 발문에 “ 아! 나는 병술(丙戌)년 봄에 만일(挽日)의 계단(戒壇)에서 선사에게 계를 받았고, 병진(丙辰)년 겨울에 보련각(寶蓮閣)에서 선사의 진영에 예배하였으며, 정사(丁巳)년 여름에 조계산방(曹溪山房)에서 선사의 시를 편집하였다. 이는 참으로 오랜 겁(劫)동안의 기이한 인연으로 해남의 두륜산과 조계산에서 이 일을 마치게 된 것이니 특별히 한 때의 감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범해의 시문집은 1917년 여름 송광사에서 금명에 의해 완성되었다.
범해와 다송자는 이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로 서로 애정과 존경이 각별하였으며, 다송자 금명은 범해로부터 계(戒)와 선(禪)과 교(敎)를 모두 전해 받은 사상의 적자(嫡子)였던 것이다.
8. 다송자의 다풍(茶風)
이 근래에 한국의 경제가 좋아지고 우리의 전통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왕성한 연구가 있었고 차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어쨌든 우리의 전통 차문화(茶文化)를 승계(承繼)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라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차문화는 불교의 사원이나 승려들과 연관이 깊으니, 당시의 차문화를 이해하려면 그 분들의 문학을 통해 살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금명스님은 평생 동안 차를 즐겨하면서 자호(自號)를 다송자(茶松子)라 하였는데, 거기에는 아마도 ‘차(茶)를 즐겨하는 송광사(松廣寺)의 승려’라는 자긍심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송광사는 고려 때에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대혜어록(大慧語錄)의 영향을 받아 해동의 불교계에 간화선(看話禪) 수행법을 처음으로 제창(提唱)한 도량(道場)으로 고려 때에 16국사를 배출한 동방제일대가람(東方第一大伽藍)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기라성(綺羅星)같은 선지식(善知識)들이 출현하여 명실(名實) 공(共)히 한국불교의 승보종찰(僧寶宗刹)이 된 사찰이다.
그런데다 송광사 일대에는 큰절 주변과 광원암(廣遠庵) 주위와 감로암(甘露庵) 부근에 차밭이 넓게 있어서 선가(禪家)의 음다가풍(飮茶家風)이 면면히 전해왔으며, 고려 때부터 송광사의 승려들과 교류하던 고승(高僧)이나 거사(居士) 문인(文人)들 사이에는 송광사의 차에 대한 시문(時文)이 많이 전해온다.
그래서 조계산문의 송광사는 조주(趙州)선사의 끽다거(喫茶去) 가풍과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정신이 배어있는 한국 선차(禪茶)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⓵다송자 이전의 다풍(茶風)
먼저 다송자 금명의 다풍을 말하기에 앞서 그가 출가하기 20여 년 전 <아직 태어나기 8년 전>무렵의 송광사 다풍에 대해 산외(山外)의 인물을 통해서 살펴보자.
1853년에 송광사 삼일암에서 조사(祖師)공안(公案)을 참구하며 정진하였던 용악 혜견(龍嶽 慧堅: 1830~1908)스님은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 출신으로 24살이었는데, 그 때 그 분이 남긴 차시(茶詩)들은 당시 송광사의 다풍(茶風)을 짐작케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삼일암 선원에서 <登三日庵>
落莫禪菴遣客興 고요한 선암禪庵에서 나그네의 흥을 풀며
出塵身勢若神仙 속진을 벗어나니 신선 같은 신세로다.
靑燈自照松窓內 푸른 등은 스스로 송창松窓을 비추며
晧月虛過竹榻邊 밝은 달은 대나무 평상 가에 맴돈다.
茶椀閒傾能解鬱 찻잔을 기울이니 울적함이 사라지고
詩篇倦詠更淸緣 시편을 읊조리니 맑은 인연 새롭구나.
俄然遊戱仍無寐 잠간인 듯 즐기느라 잠들지 못했는데
漏盡鐘聲雲外傳 새벽의 종소리가 구름밖에 들려오네.
용악스님은 송광사로 오는 도중 그 전해인 1852년에 계룡산 사자암(獅子庵)에서 신승(神僧)으로 알려진 송광사 출신 허주(虛舟)선사를 만났을 때도 송차(松茶: 송광사의 차)를 대접받았다고 하였다.
당시 송광사 산중은 보조암(普照庵)에 응화(應和: 대둔사 출신)화상이 강설하였고, 자정암(慈靜庵)에 허주(虛舟)스님의 노사(老師)인 기봉(奇峰)선사와 침연(枕淵)선사 연월(淵月)화상 주지 계묵(契默) 등 선지식들이 주석하고 있었다.
용악스님은 18세 때 꿈에서 오산(梧山) 수암사(水巖寺)에서 차 세잔을 받아 마시는 꿈을 꾼 기연으로 전생에 그 절의 중창주(重創主)인 조실(祖室)스님의 후신으로 알려진 분이다.
[용악스님은 평생의 원을 세워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출하여 삼보종찰에 봉안했으며, 그 때 30세 연하인 다송자도 인경불사 때에 동참하여 교정의 소임을 보았다.]
그 문집에 20여 편의 주옥같은 차시(茶詩)를 남겼는데, 송광사의 보조암 은적암 삼일암 청진암 등에서 남긴 몇 편의 차시가 실려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송광사와 산내 암자마다 차 생활이 보편화되어 이 산중에서는 승가(僧家)의 범사(凡事)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보편화 되고 대량생산 되는 차로 인해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 이전에는 매년마다 관용(官用)으로 다엽(茶葉) 5석(石)을 훈조(燻造)하여 관청에 늑징(勒徵) 당하기도 하였으니 ,한편으로는 차가 부역(賦役)의 애물단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⓶ 다송자의 다풍(茶風)
다송자는 이런 다풍(茶風)이 전해오는 송광사로 출가하여 26세 때 대흥사에 가서 범해를 만나게 된다.
범해는 일찌기 초의(草衣: 1786~1866)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초의스님이 입적(入寂) 후에는 ‘초의차(草衣茶)’라는 시를 지어 차의 법제(法製)를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그리고 ‘다약설(茶藥說)’과 ‘다가(茶歌)’를 짓는 등 차와 관련된 많은 시문(詩文)을 남기기도 했다.
금명(茶松子)은 스승 범해로부터 감화(感化) 받았고 범해의 차시(茶詩)들이 실려 있는 시문집도 편찬하였으며, 옹사(翁師)인 초의의 동다송과 다신전 등을 읽어보고 대흥사의 다풍(茶風)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사실은 다송시고(茶松詩稿)에 실린 그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煎茶 <차를 달이다>
有僧來叩趙州扃 스님네가 찾아와서 조주趙州문을 두드리면
自愧茶名就後庭 다송자茶松子 이름값에 차 달이러 후원으로 나간다.
曾觀海外草翁頌 해남의 초의선사 동다송을 진작 읽고
更考唐中陸子經 당나라 육우陸羽의 다경茶經도 다시 봤네.
養精宜點驚雷笑 맑은 정신 기르는데 경뢰소驚雷笑가 알맞겠고
待客須傾紫茸馨 손님을 맞을 때는 자용형紫茸馨이 제격이니
土竈銅甁松雨寂 질화로 동병 속에 솔바람 멎고 나면
一鍾禽舌勝醍靈 한 잔의 작설차는 제호醍醐보다 신령하다.
그래서 그가 편찬한 ‘백열록(栢悅錄)’에 초의의 동다송(東茶頌)과 범해의 다약설(茶藥說) 등을 직접 수사(手寫)하여 넣었으며, 이 백열록에 수사(手寫)된 동다송은 가장 정확한 사본(寫本)으로 알려졌다. 그는 동다송을 백열록에 필사하면서 송(頌)의 운(韻)이 바뀔 때마다 조운(調韻)의 표시를 하였고, 특히 제4구의 素花濯霜發秋榮의 ‘榮(영)은 운(韻)이 맞지 않으니, [제일구의 德(덕) 제이구의 國(국)과 같은 입성(入聲)인] 白(백)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榮違韻疑白字>’는 두주(頭註)도 하였으니, 한 글자도 그냥 필사한 것이 아닌 그 안목을 느끼게 한다.
后皇嘉樹配橘德˳ 하늘이 좋은 나무 감귤 같은 덕을 내려
受命不遷生南國˳ 천명을 안 바꾸고 남국에 자라면서
密葉鬪霰貫冬靑 촘촘한 잎 눈 속에도 겨우내 푸르고
素花濯霜發秋榮<白˳> 맑은 꽃은 서리 맞고 늦가을에 무성하다<희게 피네>.
다송자는 보조국사와 제자인 진각국사의 전법기연(傳法機緣)이 된 후로 수많은 조계의 고승들로 전해져온 조계산문의 다풍(茶風)을 이었으며, 제방에서 유학하며 각 산중의 다풍도 익히고 나아가 대흥사 초의스님의 다풍을 이은 범해스님의 영향도 받았으며, 한국 간화선의 본고장 출신답게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참구하면서 시대를 넘어 조주의 다풍을 엿보고 육우(陸羽)의 다경(茶經)도 상고(詳考)하면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차에 대한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집대성하였으며, 일상 속에서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삶을 구현한 진정한 다인(茶人)이라 할 것이다.
다송자는 수학하고 교화하면서 제방(諸方)을 유력(遊歷)하는 동안 승(僧)속(俗)을 넘나들고 유(儒)와 불(佛) 사이에 교유하면서 다송문고(茶松文稿)와 다송시고(茶松詩稿) 속에 많은 시문(詩文)을 남기었는데, 그 가운데는 70여 편의 주옥(珠玉)같은 차에 대한 시문(詩文)이 들어 있으니 근세 한국 차시(茶詩)의 금자탑을 이룬 분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송광사에서는 지난 2001년 10월 14일에 석학(碩學)들을 모시고 ‘다송자(茶松子: 錦溟寶鼎)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가진 바 있으며, 그 때 다송자의 차 정신을 기리고 차의 대중화를 위해 경내의 입구에 다송자원(茶松子苑: 일명 茶松苑)을 개설하기도 했다.
⓷ 다송자 이후의 송광사 다풍(茶風)
금명보정 이후에도 송광사에서는 일제 때에 연해(蓮海)스님 등에 의해 그 다풍이 이어져 왔다.
그러다 1938년 금강산 출신인 효봉(曉峰)스님이 이 도량에 주석하면서 선풍이 새롭게 진작되고 그 다풍도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효봉스님은 다송자 출가 이전의 출생 무렵에 송광사의 선지식들을 참방하고 정진하며 송광사의 다풍(茶風)에 흠뻑 젖었던 석왕사 출신인 용악 혜견(龍嶽 慧堅)스님의 법손(法孫)답게 그 분의 오도송(悟道頌)에는 독특한 격외(格外)의 다풍(茶風)이 잘 드러난다.
海底燕巢鹿抱卵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 불난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겠는가?
白雲西飛月東走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가는구나.
해방 후에는 여수반란사건을 일으킨 잔비(殘匪)들이 조계산으로 들어와 거점으로 분탕질하면서 연이어 6.25의 동란(動亂)이 이어져 휴전하기 까지 6년 동안이나 강제 소개(疏開) 당하였으며, 그 와중에 도량의 중심부가 병란 속에 소실(燒失)되어 도량이 피폐되었다가 간신히 복구된 다음 1960년대 말에 이 산문 출신 스님들이 협력하여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설립되고 효봉스님의 제자인 구산(九山)스님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다시 조계산의 다풍이 살아났다. 구산스님은 대중들과 함께 손수 만든 차로 내방객들을 제접(提接)하였고, 상당(上堂) 설법 때에도 차를 소재로 많은 법문을 남겼다.
여기 송광사에 주석하였던 보조국사 진각국사 원감국사 등 선사(先師)들이 해동에서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의 원류(源流)를 가장 잘 지켜왔던 도량답게, 지금도 이곳 총림(叢林)의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그 다풍(茶風)을 이어가고 있다.
9. 다송자 연구의 미래
이상의 다송자에 대한 간략한 사상과 업적 등을 소개하면서 그 분의 종통과 다풍을 살펴보았으나, 필자의 관견(管見)으로 편협되고 미진한 점이 많을 것이다.
우리 학계에서 아직은 그 분에 대한 연구가 걸음마 단계이지만,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앞으로 관심 있는 학자들이 미지의 과제인 다송자 금명보정선사에 대한 연구가 깊고 폭넓게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문헌
다송자시고
다송자문고
송광사지
조계고승전
불조록찬송
동사열전
금명대종사비명병서
백열록
불조원류
용악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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