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행적을 찾아

송광사 은적암 터

불방개물방개 2021. 3. 31. 11:18

48세인 무신(戊申: 1908)년에 청진암에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다. 그 때에는 국운이 쇠퇴하여 관기(官紀)가 해이하고 일본의 간섭이 가까워지고 민정(民情)이 자못 소연(騷然)하여 온 나라가 물이 끓듯 하였는데, 지방은 더욱 혼란하여 양정(良丁)과 부민(浮民)들이 서로 어울려 군단(軍團)을 조직하고 의병을 가명(假名)하여 반일의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송광사 인근에 있던 대곡리(大谷里: 지금은 주암호에 침수됨) 출신의 조규화(趙圭和)도 스스로 군졸을 모아 의병대장을 자처하였는데, 그 의추(義酋)들이 차차 폭도(暴徒)로 전화(轉化)하여 대낮에는 숨었다가 밤에는 근처 양민의 재물을 빼앗으며 음주 겁탈 등 만행을 부렸다.

대곡리의 조씨 가문은 이 지역의 토반(土班)으로 부근의 민간인들에게 세력의 자행이 심하였으나,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규화의 백부(伯父)도 두 해전 병오(丙午: 1906)년에 송광사에 들려 성수전(聖壽殿)을 배관하려고 하면서 행패를 부리다가 챙피를 당한 일이 있어 대곡의 조씨들은 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관계 때문에 그 때 의병대장을 자처하던 조규화의 목적은 송광사를 초토화시키는 것이 목적인 듯하였다. 매일 삼삼오오 출입하면서 금품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많은 대군(大軍)을 몰고 와서 스님들을 폭행하고 묶어놓고 매질하니,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해 환속하거나 피신하여 대중이 흩어지고 절은 황폐하여 갔다.

그 해 4월 17일에 조규화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은적암(隱跡庵)에 둔거하고 있었는데, 대곡리의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 이를 탐지할 때 주지 설월(雪月)스님을 불러 사문(査問)하니 명분이 의병(義兵)인지라 일병(日兵)에게 차마 이르지 못하고 ‘전연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다시 정탐을 보내 그들의 둔거를 확인하고는 괘씸하게 여겼다. 4월 18일 밤에 일본 순사 등이 거기를 찾아 발포하여 모두 도망 가버리고 없으니 그들은 은적암과 그 아래의 보조암 두 암자를 불태워버렸다.

7월 1일에 조규화가 다시 80명의 대군을 끌고 와서 본사의 문수전에 본영(本營)을 정하고 주둔하면서 승려들을 구박하고 거금을 요구 하였다. 그 다음날 인근 주암(住岩)에서 온 수비대와 접전하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11월에 조규화의 무리에게 승려가 피살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런 사건 등으로 각 암자와 큰절이 텅 비게 되는 지경이 되었다. 조규화는 그 다음해 목사동 신전리에서 사살되었다. 그 당시의 그런 참화를 겪으면서 본사는 4만여 냥(兩)이 탕진되어 사원의 보존이 어렵게 되었다. <당시에 좋은 논 1두락이 60냥이었다 한다.>

이런 와중에 그 무리들이 송광사를 불태우려고 하는 것을 다송자는 몸으로 막아내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노력을 다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는 뒷날 금명보정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무신년 여름에 한 산중이 병란의 화재를 입게 되어 대중이 모두 달아나버렸는데, 홀로 위험에 당하여도 겁내지 않고 순교할 것을 맹서하였으니, 신령스런 옛 고찰의 도량이 초토(焦土)를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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